‘빌려준 사람만 있고, 받을 사람은 없다’는 말 들어보셨나요?
받아야 할 돈은 분명히 있는데, 내가 언제 돈을 빌렸냐는 식의 채무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갚을 돈이 없다는 배 째라 식의 행동, 심지어는 잠수를 타서 달라는 말조차 할 수 없는 경우까지...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하는 채권자의 고충은 생각보다 다양한데요.
이렇게 괘씸한 채무자들에 맞서는 채권자들, 너무 답답하죠. 빌려간 돈을 주지 않는 채무자 소유의 물건이나 돈, 영업장 물건을 자기가 빌려준 만큼의 가치와 같은 것이라면 직접 가져와서 변제에 충당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채권자의 마음대로 채무자 소유물을 가져와서 직접 변제해도 되는 걸까요?
법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이란?
“자력구제”란 사인(私人)이 자기의 권리를 보호하거나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실력을 행사하여 강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공적인 힘이 실린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개인이 스스로 해결하는 것인데요. 얼핏 보면 피해를 입은 사람 측의 당연한 권리행사 같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기준으로 자신의 권리를 해친 상대방을 '처단'한다면 법치주의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법제상 행정기관에 신고를 하거나 소송 청구 등 법적 구제수단을 거치지 않고 직접 피해를 끼친 상대에게 똑같이 되갚아주거나, 빚 안 갚는 채무자의 재산을 마음대로 가지고 오는 식의 보복행위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을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눈뜨고 당하기만 해야 할까?
자력구제가 인정되는 예외사항
그러나 항상 원칙이 있으면 예외도 있기 마련이죠. 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법과 형법에서 규정하는 자력구제가 가능한 예외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민법> 제209조(자력구제)
점유자는 침탈 후 즉시 가해자를 배제하여 이를 탈환할 수 있고 동산일 때에는 점유자는 현장에서 또는 추적하여 가해자로부터 이를 탈환할 수 있다. |
민법에서 인정하는 자력구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침해행위가 일어나기 전에 행사하는 ① 자력방위권(민법 제209조제1항)과 침탈 후 즉시 단시간(사회관념상 가해자를 배제하여 점유를 회복함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시간) 내에 가해자를 배제하여 행사하는 ② 자력탈환권(민법 제209조제2항)이 있습니다.
<형법> 제23조(자구행위)
그 청구권의 실행불능 또는 현저한 실행곤란을 피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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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형법에서는 이를 “자구행위”라고 하는데요.
우리 형법으로는 엄연히 처벌하는 행위를 하였다고 해도, 위 형법 제23조 "자구행위"의 요건을 갖춘다면, 위법성이 조각됩니다. 즉 판사님께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라는 정상참작을 하여 형사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습니다.
못 받고 억울한 사람도 난데, 쇠고랑 차는 것도 나?!
이유 없는 자력구제의 위험성
그렇다면 시간이 지나도 돈을 갚지 않는 채무자 소유의 물건이나 돈, 영업장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오는 것을 문제삼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자력구제 금지 원칙에 위반되어 부당한 것일까요? 아니면 형법상 "자구행위"처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정당한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채권자가 채무자 모르게 그의 물건을 가져오면 “타인의 재물을 절취한 자”가 되어 절도죄(형법 제329조)가 성립하기도, 채무자가 가져가지 못하게 막는데도 무력을 사용하여 강제로 가져오면 “폭행 또는 협박으로 타인의 재물을 강취한 자”가 되어 강도죄(형법 제333조)가 성립하기도 합니다.
이는 절도죄 등과 같은 재산범죄의 성립요건인 타인(채무자)의 소유를 배제하고 해당 재물을 본인(채권자)의 지배하에 놓으려는 의사인 “불법영득의사”가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력구제 금지 원칙에 위반되어 불법행위의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죠.
대법원 판례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납품대금을 받지 못하고 있던 중 채권자(피고인)이 채무자(피고소인)가 영업장을 폐쇄하고 도주하자, 피해자의 물건을 몰래 가지고 나온 사건이었는데요. 대법원은 채권자의 행동은 형법에서 인정하는 자구행위라고 볼 수 없다고 하여 유죄를 선고하였습니다(대법원 1984. 12. 26. 선고 84도2582 판결).
채권자가 행사한 강제력은 합법적인 추심절차가 아닌, 불법 추심이라고 판단한 것이죠.
형법에서 자구행위로 인정해주는 “상당한 이유”라 함은 객관적으로 사회 상규에 비추어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범위 한도에서만 허용되는 것이죠. 법원이 인정해줄 만큼 정당한 이유에 대해서는, 채권자로서는 구체적인 상황과 객관적인 입증자료를 토대로 판사님의 판단을 요구해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력으로 권리를 실현시키는 것을 정당하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소수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민법상의 점유자에게 자력구제를 인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인정되기 어려운 게 현실이죠.
채권자 이름값하기
채권자로서의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하는 방법
형법상 문제가 되는 것일 뿐이지, 민사상 적절하게 채권을 회수할 수 있는 권리는 여전히 채권자에게 남아 있습니다. 마음대로 가져간 물건이 형사상 절도죄 등으로 문제가 되어 돌려주는 것은 별개이며 민사 절차를 통해 채무자에게 빚을 받아낼 수 있는데요.
그렇다면 돈을 빌려준 채권자로서 당당하게 내 돈을 찾는 법적 소송 절차는 어떻게 될까요?
먼저 빌려준 돈에 관하여 지급명령신청이나, 대여금 반환 청구의 소를 접수하는 것입니다. 차용증, 각서, 물품 대금 지급 약정서 등과 같이 각종 금전소비대차 계약서나 이에 상응하는 둘 사이의 돈을 빌려준 것을 증명할 증거서류를 제출하여 상대방에게 지급할 것을 청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민사소송에서 이기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법원의 지급명령 결정이나 승소 판결은 그 권리가 정당하다는 것을 법원에서 판단해 주는 것일 뿐입니다. 이후 채무자가 스스로 그 판결 내용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집행 절차를 따로 진행하여야만 실제로 변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 내 채무자가 다른 사람에게 받을 돈이 있다고?
금전채권의 경우 '특정한 물건'이 아닌, 돈이 오가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더 융통성 있게 회수할 수 있습니다. 만약 채무자가 다른 누군가(제3채무자 – 대표적으로 예금채권의 경우 은행, 직장에 다니고 있다면 회사 급여채권이 되겠죠.)로부터 받아야 할 돈이 있을 때 활용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요.
금전채권을 제3채무자가 채무자에게 지급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채권압류”나, 그렇게 묶인 돈을 제3채무자로부터 채권자가 직접 지급받을 수 있는 “추심”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받기 위해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 신청을 통해 만족을 얻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것들은 모두 사후 절차일 뿐이라는 것 눈치 채셨나요? 돈은 달라는 소장이 날아오면 여태껏 버티고 왔던 채무자가 돌연 순순히 갚으려고 할까요? 아마도 재산을 숨기려 들거나 빼돌리지 않을까요?
- 완벽한 채권 회수를 위한 보전처분
그렇기 때문에 ‘가’압류와 같은 보전처분을 본안 소송보다 먼저 또는 동시에 신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압류는 금전채권 또는 금전으로 환산할 수 있는 채권에 대하여 강제집행이 가능할 것을 대비하거나 혹은 곤란해질 수 있는 상황이 염려되는 경우 미리 채무자에게 현재 재산을 압류하여 확보해두는 것입니다. 본래 강제집행을 보전하기 위한 조치이지만 실제로는 채무자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많이 활용되기도 한답니다.
뿐만 아니라, 채무자가 재산을 숨기거나 친인척 등과 짜고 허위채권을 만들었다면 형법상 강제집행면탈죄가 성립할 수도 있고, 부동산 명의신탁에 대해서는 부동산실명법위반에, 타인 명의로 행하는 금융거래에 대해서는 금융실명법위반에 해당되어 형사고소를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글을 맺으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채권자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민사절차를 거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돈 안 주는 채무자 소유의 물건이나 돈, 영업장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오거나, 그렇게 해도 되는 건지 고민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민, 형사 소송 절차는 공적인 힘이 부여된 강력한 수단일 뿐이고, 최종 목적은 내가 빌려준 돈을 “진짜로” 받아내는 데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승소 판결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 노력이 들어가고 그 승소 판결 하나로 내 손에 바로 빌려준 돈을 쥘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때문에 무작정 내 힘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형사책임을 묻는 상황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채권추심의 시간과 비용에 있어서 가장 경제적으로 현명한 방법을 먼저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채권 추심은 타이밍이 중요하고, 시간이 지체될수록 채무자에게 유리하기 마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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