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으면 좋다는 뜻 아니야?"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아니, 요즘 같은 시국에는 거의 모든 국민들이 한 번쯤은 접해보셨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이 것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명확하게 알고 계신 분들이 적으실 겁니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성별 간의 불균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갖춰 일상생활 속에서의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을 말합니다. 특히 법적으로는 성범죄 사건 등 관련 사건을 심리할 때 피해자가 처한 상황의 맥락과 눈높이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죠.

그런데 이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한 예로 성범죄 관련 재판에서 피해자의 증언 하나만으로 유죄를 선고했던 경우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일이 빈번했는데요.
오늘 포스트는 한 성범죄 판결을 통해 과연 우리 법조계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건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도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김음흉 씨는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사장님입니다. 휘하에 10명 정도의 직원을 두고 있는데요. 최근에 신입 여사원으로 박순진 씨를 채용하였습니다. 이번 입사가 첫 사회생활인 박순진 씨는 행여나 실수라도 할까 매사에 열심히 일했는데요. 사장인 김 씨는 이런 박 씨를 기특하게 여겨 특히 아끼고 잘 챙겨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씨의 회사는 단체 회식을 하게 되었는데요. 평소 술을 좋아하는 김음흉 씨는 평소보다 훨씬 더 과음을 하였죠. 그렇게 1차와 2차를 끝낸 김 씨와 직원들은 마지막 3차로 노래방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단이 발생합니다. 만취한 김 씨는 평소 아끼던 신입사원 박 씨를 자신의 옆자리에 강제로 앉혔는데요. 김 씨는 박 씨에게 귓속말로 ‘힘든 것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다 해결해 주겠다.’라고 얘기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어색하게 웃은 박순진 씨. 그런 박 씨의 반응을 보고 김 씨는 자신의 오른손으로 박 씨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주무르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한 박 씨는 김 씨에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김 씨는 막무가내였죠.
입사 후 첫 회식자리에서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상대가 사장이라는 것이 박 씨를 더욱 주눅 들게 하였는데요. 결국 박 씨는 김 씨 옆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박순진 씨는 회식 날 겪었던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김음흉 씨를 강제추행죄로 고소하였는데요. 과연 김 씨는 처벌을 받게 될까요?
분명 가만히 있었다고요!
강제추행죄는 우리 형법 제298조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죠.
법문의 해석상 강제추행죄는 폭행 또는 협박행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로 인해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다시 말해 의사를 제압하는 것이 필요하죠.
그러나 대법원은 폭행 또는 협박행위가 전제되는 강제추행 말고도 폭행행위가 곧 추행행위인 이른바 '기습추행죄'도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기습적으로 껴안는 행위나 상대방의 신체부위를 갑자기 만지는 행위 등이 기습추행죄에 해당하죠.

위 사례 역시 정황상 강제추행이 아닌 기습추행에 해당합니다. 사례에서 피해자인 박순진 씨는 비록 격렬한 저항 없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이러한 사정만으론 김음흉 씨의 행위를 용인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습니다.
박 씨의 회사 내 지위가 신입사원이라는 점과 김 씨는 회사 사장이라는 점,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는 박 씨의 주장이 일관되었다는 점, 사건 당시 동석했던 다른 직원들의 증언에도 박 씨가 무척 당황스러워 보였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김음흉 씨의 행위가 기습추행죄에 해당한다고 인정한 것이죠.
글을 마치며
이번 사례와 법원의 판결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요? 여전히 우리 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에 대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비일관적인 태도인 것 같나요?
사실 범죄행위를 당했을 때 용기를 내어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범죄를 겪는다는 건 평온한 일상과는 다른, 혼돈과 충격이니까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인식되고 있는 성인지 감수성에 대해 보다 심층있는 고찰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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