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번 물면 놓아주지 않는 자라에게 물린 사람은 너무 아픈 나머지, 자라의 등딱지와 비슷하게 생긴 솥뚜껑만 보아도 깜짝 놀라게 된다는 뜻이죠. 이처럼 어떤 것에 한번 제대로 혼이 나면 그와 비슷한 것만 보아도 지레 겁을 집어먹게 될 때를 나타내는 말인데요.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어려운 말 같지만 비슷한 맥락입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도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할까?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또는 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란 충격적이거나 두려운 사건을 당하거나 목격하는 것과 같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나서 발생하는 심리적 반응입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는 그런 외상이 지나갔음에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당시의 충격적인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외상을 떠오르게 하는 활동이나 장소를 피하게 되고 우울증, 대인관계 기피 등 다양한 모습으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외상”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만이 아니지요. 다른 누군가의 잘못으로 발생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민법은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민법 제750조).
이를 손해배상책임이라고 하는데요. 타인에게 끼친 손해가 없었던 것과 같은 상태로 원상 복귀시켜야 하지요.
그렇다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도 여기서 얘기하는 “손해”에 해당하여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걸까요? 우리 법에서는 어떤 식으로 인정되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할게요.
case 1. 가족의 교통사고를 목격만 한 경우에도
‘PTSD’ 가 인정될까요?
네,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인정됩니다. 실제 사례도 있어요. 직접 사고를 당하지 않고 목격만 했더라도 외상후 스트레스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을 소개합니다(대법원 2008. 9. 11. 선고 2007다78777 판결).
직접 외상을 입지는 않았더라도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을 목격해 받게 된 정신적 고통과 충격이 ‘외상적 사고’로서 작용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의 발병원인이 될 수 있음은 의학적으로도 인정된다고 해요.
이 사건 역시도 동생이 갑작스럽게 달려든 사고 차량에 치여 크게 다친 것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여 트라우마가 생긴 언니에 대한 사건이었는데요. 당시 만 9세 정도에 불과했던 가족의 입장에서 상당한 정도의 정신적 충격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이 여자 어린이는 동생의 사고 이후 말이 없어지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등의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며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하였습니다. 법적으로도 더 따져볼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물론 실제로 소송으로 간다면 어려운 입증 책임이 따르지만요)
보험사는 이 어린이에게 보험금을 지급할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었는데요. 결국, 대법원은 피해 어린이의 트라우마를 인정하였습니다. 따라서 원심판결의 보험회사의 보험금채무 부존재확인청구 부분을 파기하고 이 부분을 다시 심리·판단하기 위해 원심법원으로 환송하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case 2. 직장내 우위관계를 이용해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폭언 및 물건을 집어던지는 행위
네, 역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정됩니다!
2018년 10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한 재판부는 비서에게 상습적으로 폭언을 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전 일본 주재 총영사에게 유죄를 선고하였습니다. 피고인 한씨는 함께 일하던 비서에게 장기간 수십차례에 걸쳐 폭언과 모욕적인 욕설 등을 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비서의 얼굴에 볼펜을 집어던지고 휴지 박스로 손가락이나 손등을 때리기도 하였다고 하는데요. 이 비서는 결국 우울증 진단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법원은 이 사건에서 폭언이 원인이 된 정신적 피해에 대해 상해죄를 인정하였는데요. 이 점을 미루어볼 때, 비서의 우울증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인정되어 민사소송을 진행할 시 형사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인정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case 3.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손해배상청구권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이 경과하면 소멸하죠. 그렇다면 14년이 지난 아동기의 성폭행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앓고 있는 경우에는 손해배상청구가 불가능할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손해배상청구 시효의 시작인 '불법행위를 한 날'을 성폭행을 당한 날이 아닌 폭행으로 인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을 받은 날로 보고, '잠재적인 손해가 발생한 날'부터 소멸시효를 계산하여 손해배상이 인정된 경우가 있습니다.
사건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성학대를 당하고, 약 14년 후인 2016년 가해자와의 대면으로 정신적 고통이 증폭되어 정신과 치료를 받던 중 처음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진단받은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의 주요 쟁점은 민법 제766조 2항에 의한 '불법행위를 한 날'을 어떻게 해석할지 여부였습니다.
법원은 "불법행위를 한 날이란 객관적·구체적 손해가 발생한 때 즉, 손해 발생이 현실화된 때를 의미한다"라고 보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라는 손해가 현실화된 시점인 2016년을 손해배상채권의 시효 기산일로 판단하여 위자료 1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시했습니다.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기산점에 대한 기존과는 다른 혁신적인 판단으로 성폭력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현실화시키는데 크게 이비지할 판결이지요.
그러나 대부분 아동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 당시에는 성학대의 의미를 잘 모르다가, 성장하면서 성폭력의 의미를 알게 된다거나, 혼인 및 임신 등 유사 사건을 경험하면서 무의식에 존재했던 고통이 재현되어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임신거부증, 자살 충동 등 아동기에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행태로 후유증이 발생하거나 증폭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피해 발생 당시 피해자의 특성이나,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등을 고려하고 있지 않은 지금의 소멸시효 규정 자체의 제도적인 정비가 필요해 보이네요.
case 4. 신체감정을 담당하는 전문의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영구적”이라는 의학적 판단을 하였을 때
그 판단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면 그 장애는 “영구적”이 아닌, “한시적”인 장애로 보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관련 대법원 판례 하나를 살펴볼게요(대법원 2009. 7. 23., 선고, 2008다59674, 판결).
대법원은 재판 과정 중 교통사고 피해자의 신체감정을 담당한 전문의가 사고로 인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가 영구적일 것이라는 의학적 판단을 하였다면 그 판단 근거를 제시하지 아니하였거나 그 근거에 대한 법원의 사실조회에 회신하지 아니하였다는 사정만으로 그 판단을 후유증 지속기간의 결정에 참작할 사정에서 배제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상해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지속될 것인가 하는 점은 의학적 판단에다가 그 후유증의 구체적 내용, 피해자의 나이, 직업의 성질과 직업경력 등 여러 가지 사정을 따져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체감정을 담당한 전문의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가 영구적일 것이라는 의학적 판단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거나 그 근거에 대한 원심의 사실조회에 대해 회신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는 위 의학적 판단을 참작할 사정에서 배제할 수 없는 것이죠.
또한, 전심에서 통상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2년 내지 10년 정도의 한시장애로 본다는 점에 대한 근거가 기록상 불명확하기 때문에,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이 사건 사고일로부터 10년까지의 한시장애로 인정한 2심의 판결 부분을 파기하고, 그 부분을 2심으로 다시 환송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글을 맺으며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단어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이제는 누구나 겪을 수 있고, 법적으로 피해도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사실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장애로 고통을 겪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사고나 형사 피해 상황 외에도 공무집행 중 동료 경찰관이나 소방관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는 경우와 같은 ‘사회적 외상’도 큰 이슈가 되고 있지요.
이러한 정신적인 상처들은 눈으로 보이는 상처가 아니라고 해서 그 크기나 깊이가 절대 작지 않습니다. 많은 제도 개선을 통해 적절한 명예 회복이나 보상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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